ebs 세계의명화 '그녀' 9일(토) 밤 10시 55분

그녀

그녀(원제: Her)=감독: 스파이크 존즈/출연: 호아킨 피닉스, 에이미 아담스, 루니 마라, 스칼렛 요한슨/제작: 2013년 미국/러닝타임: 126분/나이등급: 19세

[위클리오늘=설현수 기자] 영화 <그녀>는 러브스토리이기 전에 테오도르의 성장담이다. 테오도르는 깊은 고독을 느끼면서도 대인관계에 문제가 많은 남자다. 이혼 서류 정리차 만난 캐서린에게 테오도르가 사만다와 만나고 있음을 고백했을 때 캐서린은 테오도르의 본질적인 문제를 지적한다. 

회피에 익숙한 테오도르는 사만다가 사용자인 자신의 욕망에 따르기만 하는 존재이기에 사만다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테오도르는 사만다가 육신이 없는 인공지능이기에 사만다를 은연 중에 무시하고 있으며 사용자와 피사용자인 둘의 관계에서 생겨난 기묘한 권력을 은근하게 즐기고 있다. 

앞서 테오도르는 폰섹스를 하던 상대가 죽은 고양이로 자신의 목을 감아달라고 적극적으로 요구하자 순식간에 섹스에 흥미를 잃는다. 

소개팅으로 만난 여성에게 매력을 느끼면서도 그가 지속적인 만남을 원하자 도망쳐 버린다. 테오도르는 주관이 뚜렷한 여성을 만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스스로 주관이 서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매 순간 있는 대로 결정을 미루고, 실존하는 지인들과는 어중간한 대화로 적당히 관계를 유지한다. 테오도르가 몸 담은 회사도 남의 감정을 대필해주는 곳이다. 

테오도르는 자신의 주관을 밝힐 필요가 없이 남의 감정, 남의 이야기로만 업무를 처리한다. 전혀 예상하지도 못하게 사만다가 육신을 초월한 더 높은 경지를 향해 그를 떠나고 나서야 테오도르는 자신의 한계에 직면한다. 

사랑이 한 방향에서 제어가 불가능한 감정임을, 인간관계가 한쪽의 노력으로는 완성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나서야 테오도르는 비로소 캐서린을 향한 사과의 편지를 쓴다. 자신의 진심이 담긴 유일한 편지다.

▶ '그녀' 줄거리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는 손편지를 대필하는 일을 한다. 심금을 울리는 편지로 모두에게 호평을 듣는 테오도르의 개인적 삶은 공허하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 결혼까지 하게 된 아내 캐서린(루니 마라)과는 별거 중이고, 부족한 것은 없지만 항상 외롭다고 생각한다. 

사무실을 나와 집으로 가던 테오도르는 새로 개발된 인공지능 운영체제 광고를 본다. 화면은 테오도르의 집으로 점프해 테오도르가 새 운영체제를 적용 중인 모습을 비춘다. 

운영체제는 "부를 때의 어감이 마음에 든다"며 스스로의 이름을 '사만다'라 명명한다. 테오도르는 사만다(스칼렛 요한슨)와 잠깐 나눈 대화로 사만다가 그의 마음에 꼭 들 것임을 직감한다. 

과연 테오도르와 사만다는 깊고 친밀한 관계로 발전한다. 취향이 잘 맞는 친구로 지내던 테오도르와 사만다는 여행도 함께 가고, 음악도 함께 듣고, 책도 함께 읽고 급기야는 (음성을 통한) 섹스까지 나누는 사이가 된다. 

테오도르는 사만다에게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해주고, 사만다는 그 경험을 통해 진화한다. 

한편 테오도르는 별거 중인 캐서린을 만나 이혼 서류를 정리한다. 사만다와 만족스러운 관계를 형성해가던 테오도르는 사만다가 자신과만 만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만다는 테오도르와의 관계처럼 수백명의 사람과 동시에 완전히 다른 관계를 맺고 있던 것이다. 테오도르는 자신에게 사만다가 그러하듯 사만다에게 자신이 오로지 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사만다는 테오도르와의 대화 이상의 고차원적인 경험을 원하게 되고 끝내 테오도르의 곁을 떠나 미지의 세계로 확장된다. 테오도르는 사만다와의 이별을 통해 문제에 직면하는 방식을 배우게 된다.
 
▶ '그녀' 감상포인트

과히 낯설지 않으면서도 현존하지는 않을 것 같은 영화 <그녀>의 공간은 상하이 푸동 루지아주이에서 촬영된 결과물이다. 테오도르가 걸어다니는 고가 뒤로 상하이 세계금융센터(SWFC) 건물이 보인다. 

프로덕션 디자인의 주요 색상은 음료 체인점 '잠바주스'로부터 영향 받았다고 감독이 밝힌 바 있다. 화사하고 활기찬 컬러는 무기력한 테오도르의 내면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영화에 등장하는 남성 캐릭터들의 바지가 거의 같은 디자인이라는 점도 독특하다. 감독은 개인적 특성이 지워지고 보편의 편리함이 강조된 미래를 상상한 듯하다. 

인공지능 운영체제의 목소리 연기는 원래 배우 사만다 모튼이 맡게 되어 있었다. 사만다 모튼은 현장에서 호아킨 피닉스와 함께 연기하기도 했다. 

촬영을 모두 마친 뒤 편집 중에 스파이크 존즈는 운영체제 역의 배우를 스칼렛 요한슨으로 교체해 모든 장면을 재녹음했다. 목소리만 들어도 실재하는 듯한 아우라를 풍기는 스칼렛 요한슨을 선택한 것이 더 합리적인 결정이지만 어쩐지 교활하게도 느껴진다. 

이전의 대표작들을 찰리 카우프만의 시나리오에 바탕해 작업한 것과 달리 <그녀>는 연출과 시나리오를 스파이크 존즈가 모두 담당했다.
 
▶ '그녀' 감독 스파이크 존즈

스파이크 존즈는 예명이며 본명은 아담 스피겔이다. 데이비드 O.러셀의 첫 스튜디오 영화인 <쓰리 킹즈>(1999)에 배우로 출연하기도 했다. 영화 연출 데뷔작은 <존 말코비치 되기>(1999)로 시나리오는 찰리 카우프만이 썼다. 

인형을 조종하는 남자가 우연히 배우 존 말코비치의 뇌 속으로 들어가게 된 일을 그린 블랙코미디다. 찰리 카우프만이 대필 작가로 일했던 설움을 담은 이 작품은 할리우드를 떠돌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손에 들어갔고, 코폴라가 스파이크 존즈에게 시나리오를 보여주며 둘의 만남이 성사되었다. 어렵사리 배우 존 말코비치를 설득해 출연 약속을 받아내 완성한 영화는 성공적으로 두 사람을 할리우드에 안착시켰다. 

스파이크 존즈와 찰리 카우프만은 두 번째 영화 <어댑테이션>(2002)도 함께 만들었다. 스타 시나리오 작가 찰리 카우프만(니콜라스 케이지)이 어느 논픽션의 각색을 맡아 신경쇠약에 이르다 미쳐가는(?) 과정을 그린다. 

모리스 센닥의 그림책을 각색한 <괴물들이 사는 나라>(2009)는 말썽쟁이 소년이 괴물들의 나라를 여행하고 돌아오는 과정을 그린 사랑스러운 모험 영화다. 사랑에 관한 철학을 모던한 애니메이션으로 연출한 <아임 히어>(2010), (영화 <그녀>의 테마곡을 담당하기도 했던) 록밴드 아케이드 파이어의 3집 앨범에 영감을 얻어 만든 뮤지컬 <신스 프럼 더 서버브>(2011), 한밤의 서점 안 로맨스를 담은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당신 곁에 잠들고 싶어요>(2013) 등 단편 영화도 다수 만들었다. 

<그녀>에선 테오도르가 즐기는 게임 속 되바라진 어린이 캐릭터의 목소리를 직접 연기했다. 현재 TV시리즈 제작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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