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성한 활동 90년 오너 해부

 

[위클리오늘=안정만 기자] 원경선 풀무원 창업자가 지난 8일 향년 100세에 타계하면서 ‘직업이 회장님’으로 불리는 식품업계 장수 원로들이 다시 세간의 이목을 끌고 있다. ‘한국 유기농 농업의 아버지’로 불리는 고인은 별세 이전까지 별다른 질환 없이 왕성한 공동체 운동을 펼쳤다.

식품업계에는 여든 살을 훌쩍 넘어 90대에도 여전히 경영 일선을 넘나드는 고령의 오너들이 유독 많다. 정재원(97) 정식품 명예회장, 전중윤(95) 삼양식품 명예회장, 임대홍(94) 대상그룹 창업회장, 박승복(92) 샘표식품 회장, 배상면(90) 국순당 회장, 윤덕병(87) 한국야쿠르트 회장, 함태호(84) 오뚜기 명예회장, 신춘호(82) 농심 회장 등이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80~90대 ‘회장님’들은 회사에 꾸준히 출근하거나 주기적으로 공장을 방문하는 등 어지간한 중장년 CEO 못지 않게 현장을 활발히 누비고 있다.


90대 원조 CEO 트로이카

정재원 명예회장과 전중윤 명예회장, 박승복 회장은 식품업계 원조 CEO 트로이카로 불린다. 이들은 철저한 자기관리와 뚝심으로 회사를 명가의 반열에 올려놨다. 
 
▲ 박승복 샘표식품 회장. 사진=뉴시스

정식품 창업주인 정 명예회장은 1917년생으로 업계 최고령 오너다.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매주 목요일 서울 회현동 사옥으로 출근한다. 때로는 정식품 연구원들을 평창동 자택으로 불러 콩 효능과 제품 등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다. 분기마다 한 차례 청주공장 연구소를 방문해 신제품 아이디어를 전달하거나 토론을 벌이는 등 평생 콩에 대한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최근 소아과 의사에서 정식품을 세워 베지밀을 선보이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자서전을 준비하고 있다. 콩에 대한 효능과 두유 개발 스토리가 자세히 담길 예정이다. EBS 라디오를 통해 영어 공부도 이어오고 있다. 
 
‘한국 라면의 대부’인 전중윤 삼양식품 명예회장은 올해 95세(1919년생)다. 독서광으로 유명한 그는 요즘 자택에 머무는 시간이 많지만 신제품이 나오면 미아동 본사에 나가 시식하고 검점하는 등 회사에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2년 전 장남인 전인장 회장에게 경영을 맡긴 뒤부터 자신이 직접 일궈낸 강원도 대관령삼양목장을 매주 찾고 있다.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돼야 한다는 그의 이념에 따라 삼양목장을 만들고 사람들에게 무료 개방하고 있다. 
 
1922년생(92세)인 박승복 샘표식품 회장의 경우 원로그룹 가운데 가장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매일 충무로 사옥으로 출근해 임원진들로부터 보고를 받는다. ‘흑초 전도사’로 유명한 박 회장은 매월 임원 회의를 주재하고 신제품 개발에 적극적인 주문을 넣는다. 특히 한국상장회사협의회 회장직만 6차례, 한국식품공업협회(현 한국식품산업협회) 회장을 3차례나 연임하는 등 직함만 20여개가 넘는다. 아흔이 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오전 5시에 일어나 오후 11시에 잠자리에 든다. 
 
박 회장은 2006년 피부과에서 실시한 피부조직·탄력도·위치 테스트에서 피부나이가 50대로 나와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는 임직원들의 경조사를 자신이 직접 챙기는 등 사원들과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다. ‘집무실 방문을 닫지 않는 회장님’으로 통하는 그는 직원들에게 커피 사주는 것이 낙이라고 할 만큼 활기찬 생활을 과시한다.
 
식지 않는 기업가 정신
 
올해 94세(1920년생)인 임대홍 대상그룹 창업회장은 현역 때부터 유난히 매스컴을 멀리해 대중의 트로이카 조합에 거론되지 않는다. 장남인 임창욱 회장에게 그룹을 맡기고 일선을 떠난 지 오래됐지만 대상웰라이프의 주력 상품인 ‘클로렐라’는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 전북도청에서 근무하다 사업을 시작한 이색 경력의 소유자로, 지금도 ‘클로렐라’ 전도사를 자처하며 기업가 정신을 견지하고 있다.
 
배상면 국순당 회장은 올해 구순(1924년생)을 맞았다. 90대 실버 오너 그룹 가운데 막내격이다. 지난해부터 회사 출근은 거의 않지만 전통주 학교 운영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농민들에게 전통주 기술을 가르쳐 자생력을 갖춘 양조기술자로 육성하는 데 관심이 많다. 회사 경영진에게 이같은 교육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자주 묻는다고 회사 측은 전했다. 틈틈이 장남인 배중호(국순당 대표), 차남 배영호(배상면주가 대표), 장녀 배혜정(배혜정도가 대표) 등 자녀들에게 경영노하우를 전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82세 CEO가 현역 ‘막둥이’
 
윤덕병 한국야쿠르트 회장은 올해 87세로 80대 현역 CEO를 대표한다. 윤 회장은 이틀에 한 번씩 서울 서초구 잠원동 사옥으로 출근해 현안을 챙긴다. 오전 10시부터 경영실적이나 신제품 검토, 인수합병 등 굵직한 사안을 보고받고 오후 4시에 퇴근한다. 발효유의 대표격인 야쿠르트를 키워낸 그는 규칙적인 생활만큼 일처리가 매섭다.
 
1930년생(84세)인 함태호 오뚜기 명예회장도 회사에 꾸준히 출근해 주요 현안과 경영지표 등을 직접 챙기는 것으로 알려졌다. 함 명예회장은 서울 대치동 본사 뿐 아니라 안양, 음성 등 오뚜기 공장도 수시로 방문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3년 전 외아들 함영준 회장에게 자리를 물려줬고 그해 식품의약품안전청으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기도 했다. 허례허식을 멀리하고 실질적인 면을 중시하는 전형적인 이북출신 경영인이다.
 
▲ 함태호 오뚜기 회장. 사진=뉴시스

신춘호 농심 회장은 1932년생(82세)으로 식품업계 80~90대 원로 오너 회장 가운데 막내격이다. 가장 젊은(?) 만큼 경영 최일선에서 농심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거의 매일 서울 신대방동 본사에 나와 신제품 개발 현황과 마케팅 부문을 꼼꼼히 챙긴다. 장남인 신동원 농심 부회장에게 힘을 실어 주고 있지만 영업실적 등 주요 현안에 대해 참여하고 있다. 연구원들도 자주 만나 조언한다.
 
백발 오너들의 야심작
 
‘백발의 회장님’이 더 이상 무슨 일을 하겠냐고 생각했다가는 큰 코 다친다. 이들 오너들의 아이디어로 탄생한 브랜드들은 가볍게 베스트셀러를 넘어선다. 
 
신춘호 농심 회장은 자사 대표 브랜드인 신라면에 이어 2008년 냉면 신제품 개발을 지시, ‘둥지라면’을 론칭해 효자상품으로 등극시켰다. 직원들에게 유명 냉면집을 돌아보고 맛을 찾으라고 주문했다는 후문이다. 둥지라면은 신 회장의 관심 속에 출시 2년만에 누적판매량 5000만개를 돌파했다. 그가 직접 개발에 참여한 ‘후루룩 칼국수’는 지난해 초 출시 2달여만에 월매출 4억원을 기록했다.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은 ‘안성탕면’도 신 회장이 개발 모티브를 제공했다. 그가 심혈을 기울인 ‘너구리’는 30년간 우동라면 1위를 차지하며 2011년 말 기준 누적판매량 45억봉, 누적매출액 1조3000억원을 기록한 라면업계 메가브랜드다.
 
신 회장은 올해 먹는샘물 ‘백두산백산수’와 녹용 성분인 강글리오사이드를 함유한 커피믹스 ‘강글리오커피’에 주력할 것으로 알려졌다. 고급 라면 ‘신라면블랙’의 시장지배력도 한층 강화시킨다는 구상이다. 그는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셋째동생이다. 
 
박승복 샘표식품 회장은 흑초를 상품화한 ‘백년동안’ 개발에 직접 뛰어 들었다. 일본, 중국 등지에 출장을 갈 때마다 흑초 관련 제품을 수집해 회사 연구소에 전달했다. 2011년 전년 대비 60% 급성장을 통해 400여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이 제품은 샘표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올라서며 마시는 식초음료 시장에서 강자로 군림하고 있다.
 
조미료의 대명사 ‘미원’을 탄생시킨 임대홍 대상그룹 창업회장은 1980년대 지병인 당뇨 때문에 당시 일본에서 각광받던 ‘클로렐라’를 접하게 된다. 복용 이후 당수치가 낮아지는 효과를 본 임 회장은 직원들에게 제품연구를 지시하고 1999년 제품화에 성공했다. 임 회장의 별명이 ‘실험광’이다. 현재 대상웰라이프의 클로렐라 제품은 국내 관련 시장에서 점유율 70% 이상을 기록하며 독보적인 선두를 달리고 있다. 2011년 3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흥행 보증수표가 따로 없다. 시중에선 클로렐라 제품이 당뇨와 체내 중금속 배출에 효과적인 것으로 알려져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삼양라면’은 한국식 라면의 효시로, 국내 식량문제 해결을 위해 전중윤 삼양식품 명예회장이 일생을 바친, 영혼이 담긴 제품이다. 국민 다수가 배고픔에 허덕이던 시절에 값싸고 영양이 담긴 라면을 개발, ‘식족평천’(食足平天·먹는 게 족하면 천하가 태평하다)의 대의를 이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장수비법 따로 있나
 
▲ 정재원 정식품 명예회장.사진=뉴시스
정재원 명예회장은 ‘콩’, 박승복 회장은 ‘식초’, 임대홍 회장은 클로렐라, 윤덕병 회장은 ‘유산균’ 등을 입에 달고 산다. 모두 건강에 좋은 것들이다. 대외활동도 무척 적극적이다. 여기서 장수 회장들의 공통점이 발견된다.
 
정재원 명예회장은 요즘 새벽 5시에 일어나 가벼운 산책과 반신욕을 즐긴다. 그는 자신의 건강 유지 비결에 대해 베지밀이라고 말한 바 있다. 1986년 고혈압과 협심증으로 큰 수술을 받은 뒤 매일 하루 3팩씩 꾸준히 마신다. 이후 40대부터 앓았던 당뇨병은 인슐린 투약이 더 이상 필요 없을 정도로 호전됐다. 혈압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정 명예회장은 자신의 건강관리를 위해 식단에 가장 신경 쓴다. 순식물성 식품의 효능에 대한 신념이 강한 그는 최대한 살짝 조리한 순한 음식을 찾는다. 수퍼푸드(super food)로 알려진 콩, 토마토, 호두, 호박, 시금치, 브로콜리 등을 매 세끼 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으로 섭취한다. 두유 회사 오너답게 콩이 듬뿍 들어간 잡곡밥을 고집한다. 육류는 가끔 스테이크 형태로 맛만 보는 편이다. 배, 사과, 한라봉 등 제철과일을 챙기고 매실주나 레드와인도 간혹 마신다.

▲ 전중윤 삼양식품 명예회장. 사진=뉴시스

전중윤 명예회장은 강원도 대관령 ‘삼양목장’을 자주 찾는다. 해발 800~1300m인 목장에서 수목을 가꾸고 맑은 공기를 쐬는 것 자체가 건강관리에 도움을 준다고 한다. ‘한국식 라면의 아버지’답게 건강에 좋지 않을 것이라는 일반의 인식과 달리 주 1~2회 라면을 먹고 있다. 자신의 건강비법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박승복 회장이 밝히는 건강 비결은 ‘흑초’다. “술도 마시고 소식은커녕 음식이 없어서 못 먹는다”는 박 회장은 하루 3번 흑초를 마시는 것 외에 딱히 건강관리가 없다고 한다. 그는 위궤양과 만성위염 등 술병을 앓던 1980년도 일본 출장길에 식초가 건강에 좋다는 말을 듣고 음용하기 시작했다. 피곤함이 사라지고 평소보다 몸이 산뜻해졌다고 한다. 30여년간 꾸준히 마셔오면서 결국 발효흑초 제품인 ‘백년동안’을 개발했다. 
박 회장이 가장 좋아하는 메뉴는 된장찌개이고 신춘호 농심 회장은 냉면, 국수 등 면류를 즐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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